[고흐와 고갱]“빛을 좇은 두 영혼: 고흐와 고갱, 우정의 색이 갈라진 날”
“빛을 좇은 두 영혼: 고흐와 고갱, 우정의 색이 갈라진 날”
“화가에게 붓보다 어려운 것은, 다른 화가와의 공존이었다.”
1888년, 아를의 햇살 아래서 시작된 우정은 그렇게 찢긴 캔버스처럼 찢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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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우정은, 뜨겁기에 더 위험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만남은 그런 관계였습니다.
서로를 이해하려 했고, 함께 창조의 낙원을 꿈꿨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의 ‘빛’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1. 아를의 노란집에서 시작된 실험
1888년,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노란집을 마련해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가 가장 원했던 첫 번째 멤버는 고갱.
고갱은 현실에 지친 채 마지못해 내려왔고,
그들의 동거는 9주 만에 파국을 맞이합니다.
고흐는 고갱을 동경했고,
고갱은 고흐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엔, 고흐의 ‘귀 자해’라는 충격적 사건이 남았죠.
> “예술가들은 가까이 있을수록 더 멀어진다.”
— 폴 고갱의 회고록 중
2. 우정을 찢어놓은 '색의 차이'
고흐의 붓은 언제나 감정을 따라갔습니다.
그의 노랑은 태양을,
푸름은 외로움을,
붉음은 고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에 반해 고갱은 상징과 철학을 따랐죠.
그의 색은 현실을 떠난 꿈의 질감이었고,
‘보이는 것 너머’를 담으려 했습니다.
두 사람의 캔버스는
같은 풍경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색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질감은 예술적 긴장으로 시작됐지만,
결국 관계를 삼킨 감정의 파도였죠.
3. 파국 이후, 서로를 그리다
고갱이 떠난 뒤,
고흐는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며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 속 노란 빛은,
어쩌면 고갱을 향한 화해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고갱도 자신의 그림에 고흐를 숨겨 남겼습니다.
그들은 말하지 못한 마음을
그림으로만 남겼죠.
> “고흐는 위험한 사람이었지만,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려 했다.”
— 고갱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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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문장
어쩌면 그들은, 너무 달라서 아름다웠고
너무 닮아서 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합니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두 사람의 ‘색’은 영원히 남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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